추석 연휴 동안 한 일은 게임하기, 영화 보기, 박물관 갔다 오기, 산책하기 등 다양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읽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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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연휴 동안 북유럽 신화에 대해 읽고 감상해 본 바를 글로 남겨보려 한다.
북유럽 신화는 완결이 있는 이야기이다. 바로 라그나뢰크(Ragnarök)이다. 라그나는 신들을 의미하는 레긴의 복수형이고, 뢰크는 황혼, 혹은 파멸의 듯을 지닌다. 그렇기에 직역하면 신들의 황혼이나 신들의 파멸로 뜻을 읽을 수 있다. 이 황혼으로 인해 북유럽 신화의 세계는 잔혹한 불덩이로 유린당하고 생명은 사라진다. 그리고 그 원인은 거인과 신들의 전쟁으로 상징되는 갈등이자 충돌로 볼 수 있다.
북유럽 신화는 갈등이 있는 문학이다.
이 갈등의 주역이 되는 신들과 거인들의 관계는 재미있다.
특히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의 거인들과 북유럽 신화의 거인들이 다른 것이 나에게 흥미를 느끼게 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의 거인은 티탄 족이라고 생각한다. 티탄 족은 그 이름의 뜻처럼 먼저 손을 뻗은 자로(사실 이런 해석을 한 책은 유명하게 헤시오도스의 신통기가 있지만, 티탄이란 이름의 어원을 불확실하다. 영구의 제인 엘렌 해리슨이라는 고전문학자는 고대 그리스어로 티탄이 하얀 땅이나 점토를 뜻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그들의 우두머리인 크로노스가 아비인 우라노스를 해지웠다. 그 후 자신의 자식에게 자리를 빼앗긴다는 목소리에 두려움을 지니게 된 크로노스는 자식을 삼키는 행위를 해왔고, 제우스를 자신의 아내가 숨겼고. 그 후 자란 제우스가 티타노마키아라는 대전쟁을 일으켜 크로노스를 물리치고 지배자의 위치에 오른다.
이처럼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거인은 신들과 갈등이 있기는 하지만, 신들 이전의 세상을 상징하는 구시대이고, 티타노마키아 이후 모든 티탄이 처리되진 않았음에도 역사에서는 서서히 잊혀진다.
북유럽 신화의 거인들은 갈등의 뿌리가 다르다. 북유럽 신화의 세계가 생겨난 순간, 신화의 무대가 생기기 시작한 순간이 오딘 삼 형제가 태초의 거인 이미르를 죽이고 그녀의 시체로 세상을 창조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신들이 태초의 거인을 죽임으로써 이야기가 시작할 수 있었기에, 예컨대 거인들과 신들의 갈등은 신화가 쓰여지는 처음부터 고정된 숙명이며, 태초부터 결정된 것만 같다. 거인들은 그렇기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들과 충돌하고, 신들도 그들과 싸운다.
이런 북유럽 신화 속 거인은 무엇을 보고 만든 존재일까? 그리스 로마 신화의 거인들이 신화를 쓴 시대의 이전에 구시대를 의미하는 자들이라면, 북유럽 신화의 거인들은 무엇을 의미라는 존재들인가?
그에 대한 답은 자연이라고 생각했다. 고대 북유럽 사회에서의 혹독한 자연이야말로 신이 아니고서야 맞설 이 없는 거대한 폭력이므로 그 당시의 사람들은 신들이 맞서는 거인에게 자연의 이미지와 성격을 담아 적어내려 갔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신화를 읽어나가다 보니, 신들도 다르게 보였다. 자연에 대비되고 맞서는 존재는 인간이 아닌가? 유전자에 저항하는 인간만의 힘이 밈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신을 밈으로 보면서 신화를 읽었었다.
물론, 나는 밈이라는 개념에 대해 너무 무지하고, 단순히 자연의 대비됨으로 밈이다 라소 상정하는 것을 좋지 않은 태도이다.
그럼에도 이런 비합리적 감상을 통해 신화를 일고서 나름의 결론이란 부분을 만들 여력이 생겼다.
라그나뢰크가 일어나고서, 아스가르드의 비그리드 평원의 전투가 일어나고서, 수르트의 화염이 아홉 세계를 덮고 위그드라실을 고통에 신음하게 하고 나서, 그다음에도 사람들이 남는다. 그리고 새로운 신들도 남는다. 세대는 교체되고, 아스가르드는 새로운 신들이, 미드가르드는 새로운 사람들이 자리 잡는다. 그리고 새로운 신들에 의해 황금의 시대가 선포된다.
이를 밈으로 본 신들의 역할과 관련지어 생각해 봤을 때, 자연이라는 인간의 힘으로 이길 수 없는 목력에 맞서는 밈으로 구축한 신이라는 개념은 이 라그나뢰크에서 거인들과 함께 소멸했다.
그리고, 다음의 신들을 만들어냈다.
황금의 시대에 맞게 그들의 새로운 신들을, 새로운 밈들을, 새롭게 퍼뜨리고, 공유하고 싶은 개념을 만든 것이다.
기존의 있던 신의 소멸로서 새로운 신의 작성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는 켐벨이 신화를 통해 농경 문화의 유형을 구분할 때 사용한 하이누벨레 유형의 이야기와 맞아떨어진다.
하이누벨레는 인도네시아 신화에 등장하는 여성의 이름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모함을 받아 죽게 되고, 시신은 절단되어 묻혔다. 그러나 그 시신에서는 구근작물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
북유럽 신화는 이미 태초의 거인 이미르를 죽여서 세상을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하이누벨레 유형이다.
그리고 나는 라그나뢰크도 하나의 하이누벨레, 관념(신)의 하이누벨레라고 생각한다.
라그나뢰크를 통해, 죽음을 통해 새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다.
여기서의 죽음은 단순한 의미로서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 길이 될 수 있고, 새로운 도약을 하기 위한 희생으로 그 의미를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은 성경에서도(요한복음 12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래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그리고 성경에서 이야기한 열매가 떨어져야 생명을 맺는다는 맥락의 타로카드의 메이저 13번 '죽음'의 의미와 밀접하다.
결국에 북유럽 신화를 읽고 느낀 점은 완결이 있는 이야기라도, 그 속의 의지(혹은 태도)는 이야기의 끝에서 또 다른 생명을 맺는다는 점이다.
삶의 한순간에 고통을 맞닥뜨려도 이를 피하거나, 이에 대해 굴복하기보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에게 그 고통이 할 역할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고통을 감내하고서 내가 해내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자는
나름의 다짐도 생각했는데.
이는 은근히 프랭클의 이론과도 닮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