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에게 어제 하루는 얼마나 힘듣 날이었을까
지나가며 한 대씩 툭툭 치고 가는 아이들과
소중한 단추와 당근코도 빼앗아가기도 하는 학생들
눈사람은 오늘은 목욕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할까
하고 잠깐 생각한다
꽃은 지기 위해 피진 않는다라는 말처럼
눈사람도 녹기 위해 오지 않는다
눈사람은 그럼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몰라도
어제처럼 이리저리 상처받거나
가만히 녹아가는 건 하고 싶지 않다
녹아도 차라리 자기가 좋아하는 곳에서
녹아내리고 싶어 한다
집으로 오는 길에 저물어 있는 꽃을 보며
저 꽃은 지기 위해 피진 않았겠구나 하고
생각에 잠기곤 해본다
집에 들어와도 반겨주는 이 아무도 없지만
눈사람은 조용히 귀가한다
신발을 벗고 에어컨도 키고,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조용히 앉아 찬바람을 쐬며 티브이를 보던
눈사람은 또 한 번 생각에 빠진다
자기가 처음 느꼈던
자기한테 당근코를 달아주던
소녀의 손길
소녀는
“눈사람아, 너는 여기서 오래오래 있어 줘. 내가 다음 겨울에 만나러 갈게”
라고 말했었다
추억에 잠긴 눈사람은 눈을 감고 어느새 잠이 든다
다음 날 아침 해 아래
눈사람은 다시 신발을 신고
단추와 당근코를 달도 밖으로 나간다
소녀가 오기로 한 곳에서 계속 기다리기 위해서
꽃은 지기 위해 피지 않듯이
눈사람은 단지 녹기 위해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지 않는다
눈사람은 소녀를 기다리며 천천히 바닥과 가까워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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